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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해설사와 함께 걷는 우리 마을 이야기> 공릉동 출신 먹골배와 태릉갈비

강봉훈
2024-01-26
조회수 85

공릉동의 옛 마을 이야기 4

 

30년 전 공릉동으로 이사 와서 많이 듣던 말은 “좋겠다. 매일 태릉갈비 먹을 거잖아.” “이번에 태릉 쪽으로 가는데 갈비는 어느 집이 맛있어?”입니다.

 

집에서 손님맞이라도 하면 한 끼 정도는 태릉갈비를 먹어줘야 대접한 티가 났습니다. 정작 태릉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맛난 태릉갈빗집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네요.

 

태릉갈비, 홍릉갈비 등 조선왕릉 주변에 갈비가 오르내리는 까닭이 뭘까요?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태릉갈비 탄생 비화는, 왕릉 제사 때 제수로 쓰고 남은 고기를 왕릉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는데. 맛 좋다는 입소문 타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팔다 보니 왕릉 이름이 낀 갈빗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왕릉 제향에는 종묘 제례와 달리 고기는 제수로 쓰지 않습니다. 곡류와 채소로 만든 음식(소선·素膳)을 올립니다. 떡, 다식, 과자류와 마른 과일, 술이 제사 음식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조선의 왕과 왕비를 모신 조선왕릉은 조성부터 관리까지 엄격한 예법에 따랐습니다. 왕릉관리에 대한 공과로 관리들이 승진하기도,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기에 나무 한 그루조차 허투루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왕릉관리에 대한 기록을 찾기 힘든 만큼, 왕릉 훼손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놀이 장소로 전락한 것과 같이, 왕릉 또한 나들이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매일신보 1943)

 

왕릉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비산비야(非山非野)라는 지형은 숲과 평지가 있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릉은 봄이면 꽃놀이, 가을이면 단풍놀이하는 장소로 최고였습니다. 국가유산에 대한 인식이 희미한 시절에 능침 꼭대기부터 정자각 근처까지 데굴데굴 구르며 놀았던 기억을 가진 분도 계실 겁니다.

 

고기를 쓰는 제사도 아닌데, 공릉동에 태릉갈비라는 고유명사가 생긴 까닭은 무엇일까요?

일제는 태릉에 먹골배 품종인 장십랑이라는 배나무를 대규모로 심었습니다. 그로 인해 태릉 주변은 봄이 되면 하얀 배꽃이 만발했고, 사람들은 꽃놀이를 즐기러 왔습니다. 1972년에 태릉에 ‘푸른동산’이라는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수영장·보트장·눈썰매장도 들어서 봄·가을뿐만 아니라 여름·겨울에도 나들이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태릉갈비’라는 이름을 단 갈빗집이 등장한 이후로 놀이동산 나들이객을 대상으로 한 갈빗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심은 배나무는 고목이 되었고, 나무 아래에 상을 차리고 먹골배를 갈아 넣은 단짠단짠 돼지갈비를 즐기는 문화는 손님들을 더욱 불러 모았습니다. 배 농장 주인들은 배를 파는 것보다 갈비 파는 일에 더 열중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 태릉 일대에 개발로 화랑대철도공원 화랑로 건너편에 있던 갈비촌은 헐리고 배나무들도 베어지고 택지로 조성됐습니다.

 

태릉갈비를 먹고 나오면 갈빗집 입구에서 미소 띤 표정의 할머니 두 분이 좌판에 자그마한 먹골배를 파셨는데 시원하고 달큼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배 농장 일이 끝나면 상품 가치 없는 배 한 무더기를 천 원짜리 한두 장에 안겨주셨습니다.

 

갈빗집이 헐리고 좌판하시던 할머니는 얼마 동안 태릉우성아파트 입구에서 보이다가 화랑타운아파트 자리의 배밭까지 완전히 갈아엎어진 뒤에는 태릉초등학교 후문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아이스크림을 팔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서울미래유산이 된 경춘선 폐철로와 화랑대철도공원이 왕릉의 나들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지금도 그 길을 걸으면 돼지갈비 숯불향에 뒤엉긴 자욱한 연기가 몸에 베는 듯하고,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먹골배 할머니 두 분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사진 설명>10여년 전만 해도 삼육대 인근에는 배나무 그늘에서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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